Review

하계훈(미술평론가)

 

 

아티스트의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는 재현이다. 그리고 재현이란 특정한 방식으로 대상을 묘사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우리 인간은 오감을 통해 외부의 자극을 감지하고 그 자극에서 발생하는 감정을 신체의 여러 기관을 이용하여 다시 외부로 표현(재현)한다. 어떤 이는 소리를 만들어내고 어떤 이는 형상을 만들어 내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몸짓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글자로 기록하여 그 감흥을 보존하기도 한다.



노준은 일상생활 가운데 주변에서 발생하는 자극을 무심하게 지나치지 않는다. 특히 그는 생활 속에서 마주치는 반려동물들에 주목해왔다. 작가는 이러한 만남에서 발생하는 인간과 동물과의 교감을 기본으로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집중한다. 미술대학 석사과정에 우연히 시작하게 된 캐릭터를 이용한 광고제작, 그리고 이어지는 방송국 어린이 프로그램에서 진행했던 클레이 애니메이션 만들기 코너를 통해 행복과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관계와 소통의 매력을 확신한 작가는 그 후 얼마간 진행해왔던 캐릭터 사업을 과감하게 접고 2004년 조소과 대학원 박사과정에 진학하면서 다시 자신의 내면에 잠재된 창작의 의지에 속도를 더하게 된다.



이 때 작가가 가진 생각은 남들이 다 하는,’ 그런 작품을 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노준이 눈을 돌린 모티브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온 클로, 하야미, 키키, 오디 등의 이름을 가지고 인간의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생기발랄함을 뿜어내는(animated) 상징적인 동물 형상의 작품들이다. 이때부터 노준의 동물 캐릭터는 플라스틱, 스테인리스 스틸, 나무, , 브론즈 등 다양한 소재의 조각상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이러한 조각가로서의 초기 활동궤적을 통해 노준은 자신이 잘 해낼 수 있는 작업을 선별하고 심화하여 작업 방향과 주제 선택을 어느 정도 완성한 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업은 그만큼 거침없는 추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국내의 각종 전시회 참가와 공모전에서 수상하는 일 이외에 일본과 대만, 중국, 인도네시아, 그리고 중동에 이르기까지 국제적으로 확장해가면서 작품 활동을 펼친 작가는 일관되게 작품의 주제를 의인화된 동물로 잡고 있다. 원래 조각이라는 장르의 덕목은 사실적 재현에 신화적 상상력을 가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조형적으로는 자연주의 혹은 사실주의적인 표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돌이나 브론즈, 목재 등을 중심으로 재료의 폭을 어느 정도 유지해 나아가면서 작가의 솜씨를 고숙련화(高熟練化)하는 데 에너지를 집중해왔다. 그러나 노준의 작품에서는 이러한 조각의 오래된 규범이 처음부터 적용되지 않았다. 애니메이션으로부터 확산된 작가의 작품은 의도적인 왜곡과 강조를 통해 조형적 반전을 시도해온 것이다. 다만 작가의 조형 훈련에서 단련된 테크닉과 재료의 선택에 있어서의 신중함 등이 이러한 작업에 적극적으로 투입됨으로써 노준의 작품에서는 키치적 작품의 속성이 읽혀지지 않는 특징을 보여준다.



노준의 작품에 등장하는 동물 캐릭터들은 조각적 규범의 틀에 갇혀서 미술사의 대상으로서 객체화된 작품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인간의 속성이 주입되고 의인화되어 작가 혹은 감상자의 존재감이 투영되어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처럼 노준과 그의 작품과의 관계는 명확하게 분리가 불가능한 측면이 있다. 그리고 작품 속의 동물들이 보여주는 표정이나 동작들은 아동들의 장난감처럼 비현실적인 외관과 속성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와 행동, 그리고 더 나아가 때로는 작가의 의도를 담고 있는 표정과 행동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혹자는 노준의 작품들을 인간을 대신하는 동물의 형상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노준의 작품이 이러한 맥락에서 오랜 동안 지속되어 오면서 점점 더 넓은 관심과 애정을 받아왔음에도 일부에서는 소재의 한정성이나 캐릭터들이 갖는 퇴행성을 염려하는 시각이 있을 수도 있지만 작가는 이미 이 점을 감지하고 있는 듯하다. 이번에 소개되는 작품들 가운데 부조 형식의 캐릭터 표현과 작품 표면의 래핑(wrapping) 등은 작품의 주제로부터 조형성으로 표현을 확대하는 시도로 읽혀지며, 구름을 뚫고 고개를 높이 든 기린의 모습의 표현 등에서는 문학적 서사와 철학적 사고로까지 주제가 확대되는 것을 읽을 수 있다.



노준은 작가로서의 자신의 작업을 평생 동안 이끌어 가는 화두로서 관계의 회복을 이야기한다. 특히 작가가 강조하는 관계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관계이며 이러한 소통을 통해 작가는 진솔한 교감과 희망을 꿈꾸고 있다. 노준과 수평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현재 전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미국 네오팝(Neo-Pop)의 대표작가라고 할 수 있는 제프 쿤스(Jeff Koons)는 마치 어린 아이들의 장난감과 같은 작품들을 제작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 자신이 그런 주제의 작품을 제작하는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를 근심과 걱정을 떨쳐버리기 위하여(to remove the anxiety)"라고 말한 적이 있다. 노준이 말한 것처럼 작품 한 점이 세상을 쉽게 바꿀 수는 없겠지만, 인간과 인간,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 일상의 증오와 근심을 떨쳐버리고 행복한 관계를 만들고 그것을 유지해가기 위하여 이와 같은 창작을 이어간다면 우리는 그러한 창작 행위에 꿈과 희망을 걸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