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이선영(미술평론가)


1. 현실과 환상


전시장은 마치 동물 캐릭터들의 경연장처럼 개, 고양이, 달팽이, 애벌레, , 펭귄을 형상화한 작품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그것들은 친숙한 소재, 귀엽고 동글동글한 형태, 깔끔하게 마감된 색채로 눈을 즐겁게 한다. 캐릭터가 자연과 도시 곳곳에 배치된 사진들은 애니메이션을 통해 움직이도록 설정되어 있는 캐릭터의 특성을 보여준다. 이국적인 자연이나 번잡한 도시 풍경 등에 배치된 캐릭터는 관객이 마주한 지금 여기의 존재들을 하나의 모형으로 인지하도록 한다. 그것이 끝이라면 이 작품들은 작가가 갈고 닦은, 또는 타고난 조형 감각이 응용된 디자인의 범주를 넘기 힘들 것이다. 이 작품 중 몇몇은 모 CF에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각 캐릭터 뒤에는 크기와 질감이 똑같은 그림자 같은 형태가 쌍으로 배치되어 있다. 명확히 디자인된 형태가 인공적 색면에 의해 다시 한번 강조되어 있는 캐릭터와 달리, 뒤에 있는 것들은 허연 밑바탕에 검정 카오스 패턴들이 표면을 뒤덮고 있다.


캐릭터 자체가 원래의 자연적 대상을 변형시킨 산물이니 만큼, 허연 형태만 따로 떼어서 본다면 원래의 모습을 추측하기 힘든 것도 있다. 그것들은 캐릭터의 캐스팅 작업에 사용된 겉틀을 이용하여 만든 것이다. 석고와 먹을 여러번 중첩하여 형성된 오묘한 무늬는 밀도가 서로 다른 것들이 서로 관통함으로서 생긴 패턴이다. 그것들은 공중에 흩날리는 연기처럼 불확정적이고, 명확한 궤적을 알 수 없다. 전시장 2층 벽에 전시된 소품들 역시, 만들어진 형태와 재료를 나란히 배치했는데, 캐릭터 옆에 한 주먹으로 뭉쳐진 수수께끼같은 실체는 재료의 느낌을 더욱 강조한다. 작가는 명확한 색과 형태로 살아있는 캐릭터와 그것의 짝패를 통해, 있음과 없음의 문제를 표현하려 했다. 전시 부제로 정해진 ‘Image-Mother & Son’에서, 아들은 있는 것을 잘 설명할 수 있는 형태이고, 어머니는 내용물을 위해 존재하지만 소용이 다하면 버려지는 겉틀을 통해 부재의 부분을 찾아냈다'고 작가는 밝힌다. 있음/없음의 문제는 실재/환상, 동일자/타자 등의 범주로 확대 해석된다.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것을 현실이라 불리우는 것이다. 예술 또한 현실의 반영으로, 문화사는 리얼리즘을 기본 바탕으로 전개되어 왔다. [환상과 미메시스]의 저자 캐스린 흄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규정한 이래, 예술은 모방적인 것이었고, 기독교는 모방론의 가설들을 무심히 지속하였으며, 따분한 세속화는 프로테스탄트와 과학적 진지함이 혼합되면서 더욱 심화되어, 이제껏 어떤 형식도 보편적인 차원에서는 리얼리즘을 대체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리얼리즘은 현대 예술의 흐름에서 지배력을 잃었다. 노준이 만들어낸 캐릭터들은 현실보다는 환상에 더 가까운 것이지만, 캐릭터 뒤의 짝패와 비교한다면 현실에 더 가까운 것이다. 노준의 작품에서 희미한 짝패는 미메시스와 구별되는 환상(fantasy)에 접근한다. 그의 작품에서 예술은 두가지 충동의 산물이다. 캐릭터가 대중들과 교감하면서 사건과 상황, 인물을 모사한다면, 그의 짝패는 환상, 권태로부터의 탈출, 놀이, 환영, 결핍된 것에 대한 갈망, 관객의 언어 습관을 깨뜨리고 주어진 것을 변화시키고 리얼리티를 바꾸려는 욕망’(캐스린 흄)에 해당된다.


 

2. 대칭에서 비대칭으로의 도약


노준의 작품은 각각이라면 특별히 눈길을 끌지 않을 수도 있는 두개의 형태가 마주함으로서 생기는 묘한 분위기가 있다. 선명한 색채와 형태를 가지는 캐릭터와 연기처럼 표면을 휘감고 있는 카오스 패턴의 짝패는 시각적으로 댓귀를 이룬다. 마치 물리학에서 입자와 반()입자, 물질과 반()물질의 가설처럼, 양자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존재한다. 오늘날 물질의 기본을 이루는 소립자에는 그에 상응하는 반입자를 가진다고 알려져 있다. 마틴 가드너에 의하면 입자와 반입자는 모든 면에서 똑같고, 단지 플러스 혹은 마이너스로 표현되는 부호만 반대이다. 어떤 입자와 반입자가 충돌하면 에너지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둘이 만나는 순간, 서로 합쳐져서 모두 소멸되어버리는 것이다. 물질과 반물질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물질과 반물질이 결합하는 경우에도 폭발, 즉 전체 질량이 에너지로 바뀌는 사건이 일어난다.


노준의 작품에서 캐릭터와 그 짝패는 마치 양자를 이루는 입자의 전하 부호만 반대이고 모든 면에서 서로 같은 것처럼 보인다. 짝패는 반입자처럼 입자의 거울상을 이룬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쌍을 이루는 두 형태는 이질성이 더욱 두드러지는데, 이 다름은 양자가 동일한 부피와 실루엣, 표면 질감을 통해 더욱 극적으로 표현된다. 대칭적인 형태들은 비대칭을 표현하기 위한 전제 조건인 셈이다. 물질/반물질의 가설은 우리의 우주가 최초의 불덩어리 상태일 때 물질과 반물질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가, 불덩어리가 식어가면서 대칭성이 무너졌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자체가 물질과 반물질 사이에 이루어졌던 대칭이 깨진 결과물인 셈이다. 이러한 가설들은 물리학이나 생물학같은 차원에 해당되지만, 우리의 생활과 보다 밀접한 경제 또한 마찬가지이다. 대칭관계에 의한 제로 섬이 아니라, 나머지들이 존재의 조건을 결정적으로 규정짓는 것이다.


노준의 작품에서 깔끔한 외피를 두르고 여기저기에 포진하고 있는 캐릭터는 일종의 생산품이다. 반면 그것의 희미한 짝패는 생산이 가능하기 위해 불확실한 모험과 실험이 펼쳐지는 장을 압축한다. 결과가 아닌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후자의 부분은 명확히 사회화될 수 없는 부분이다. 생산이 가능하기 위한 모든 전제조건을 담고 있는 이 모호한 부분을 재생산의 영역이라고 가정해 보자. 경제학에서 재생산의 영역은 출산으로 대표되는 사()적 영역을 말한다. 어머니/아들의 관계로 설정된 노준의 작품에서 예시되는 바와 같이, 예술은 물건을 만드는 것 보다는 아이를 낳는 일에 더 가깝다. 물론 예술 역시 대학, 학원, 공방 등의 제도화를 통해 사회적 생산의 영역에 포함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수면 아래에 묻혀 있는 더 많은 부분이 있고, 이곳이 바로 많은 예술가들이 고투하고 있는 영토인 것이다. 노준 역시 이 경계의 지점에서 많은 고민을 해온 작가이다.


산뜻하게 꾸미고 여기저기 쏘다니는 밝은 캐릭터 뒤편에 우울하게 고정되어 있는 그 짝패의 존재가 예시하고 있는 것은, 생산과 재생산 사이에 놓인 거리 및 괴리감이다. 가령 그의 짝패는 명확히 가시화되지 않는 그림자(shadow) 노동의 영역을 나타내고 있다. 문제는 자본주의 체제가 사회화된 노동에만 댓가를 지불하는데 있다. 예술이란 생산 보다는, 생산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 또는 생산 이후에 오는 것과 관련된다. 양자는 동등하게 대우받지 않는다. 양자는 좋은 의미에서이건 아니건, 비대칭적인 관계를 가진다. 생산/재생산 사이의 분리 및 가치 부여의 차이를 통해 자본은 잉여가치를 창출한다. 페미니즘 이론가 R. 포르투나티에 의하면 생산에서 노동은 임금 노동인데, 그것은 공장에서 수행되며 그 구조와 조직은 특유한 유형의 협업과 분업은 물론 기술적 진보도 가져온다. 반면 재생산은 사회가 아닌 자연의 영역에 속해 있으며, 생산의 거울 이미지가 된다.


노준의 작품에서 더불어 서 있는 상보적인 한쌍의 존재는 가치/비가치, 생산/재생산 사이의 존재하는 뷸균형 및 긴장감이 내포되어 있다. 사회가 생산과 재생산의 순환을 통해서 유지됨에도 불구하고 자본은 한쪽에만 가치를 부여한다. 그림자 노동에 복무하는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 체제의 희생자인 셈이다. 고전적인 경제학을 비판하는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사회적 교환을 기본 바탕을 이루는 균형잡힌 체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적 노동이 그에 합당한 댓가를 지불받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예술이 사회에 불필요한 것인가? 예술은 명확히 측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생산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기본 조건이자, 생산이 목표로 해야할 진정한 가치의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생산/재생산 간에 설정된 이러한 비대칭은 어떤 극적인 도약을 통해서가 아니면 역전될 수 없다. 여기에 생산자로서가 아닌, 예술가로서의 도전이 존재한다. 물론 작가가 생산자로서 사회에 참여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되지만, 생산자의 역할로만 한정시키려는 사회의 압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3. 타자와의 대면


하나의 존재로 통일되지 못하고 분열되어 있는 노준의 작품은 그럴듯 하게 가정되어 있는 삶과 예술 사이의 봉합된 관계를 분열시킨다. 그는 상품으로 대변되는 명료한 동일성 바깥에 존재하는 타자를 불러낸다. 모든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체계화의 바깥에 있으면서, 생각되지 못하고 잊혀진 기원을 생산물과 대면시키는 것이다. 이 짝패는 생산물로 나타나는 명확한 동일자가 타자로부터 비롯된 가상적 구축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는 명료한 생산물이 의존하는 틀, 형식, 체계, 구조의 바깥에 있는 타자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 타자는 결코 내면화될 수 없지만, 동일자를 가능하기 위해서 부단히 소통되지 않으면 안될 존재이다. 노준의 작품에서 캐릭터와 긴장된 관계를 가지는 이질적인 존재는 규칙을 공유하지 않는 타자를 예시한다. 이 분열된 존재들은 타자와의 관계가 지니는 비대칭성과 우연성을 각인하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개방적인 관계인데, 이를 통해 나와 우리를 동일시하는 유아론을 벗어나고자 한다.


노준의 작품에서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타자에 내포된 여성적 함의이다. 여성, 특히 모든 존재를 낳지만, 뒤안길에 내쳐져 있는 어머니는 대표적인 타자이다. 그의 작품에서 짝패를 이루는 쌍이 상호 간에 동등한 친구가 아니라, 어머니/아들로 설정되어 있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그것은 물리학이나 경제학 등에서 인용한 바와 같은 비대칭성에 관련된 문제이다. 동등한 존재 사이에는 투명한 소통 및 가치의 교환이 일어난다. 그러나 타자와의는 동등한 관계도 투명한 소통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투명한 의미가 아니라, 의미화 내부에 있는 이질적인 것을 가리킨다. 가족 유사성을 가지면서 모호한 그물망으로 착종되어 있는 짝패는 어머니의 역할을 맡는다. 이 짝패는 크리스테바가 정의한 모성적 존재처럼, 육체에서 출발한 충동의 표시가 아로새겨져 있다. 기호적 육체는 욕망의 출처이며 또 충동으로 가득찬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충동의 이질성에 관심을 가지고, ‘충동이란 의미화를 생산하는 물질의 끊임없는 분열이며, 항상 부재 중인 주체가 생성되는 장소라고 정의한 바 있다. 노준은 짝패를 통해서 억압되어 있는 모성적 존재와의 만남을 주선한다. 모성적 존재는 상상의 단계, 즉 허구의 구조에서 최고의 기능을 발휘한다. 2004년 스페이스 셀에서 있었던 첫 개인전에서는 모성적 육체가 [대지의 숨] 시리즈로 나타난 바 있다. 널찍한 용기(容器)의 형태로, 수평면에 누워 넉넉히 싸안는 형태는 그녀로 지칭된 대지와 관련된다. 이번 전시에서 대지에 해당하는 그녀는 주체의 짝패라고 할 수 있는 과정 중의 주체로 나타난다. 노준의 작품에서 어머니의 자리에는 연기처럼 떠도는 공허와 카오스 형태로 채워져 있다. 그것은 표상될 수 없는 애매한 모습을 취하고 있지만, 존재에 형태와 영양을 공급하는 자궁같은 사물이다.